워낭소리 이미지읽기



   김규항 선생은 대다수가 주목하는 '소와 남자'의 아름다운 우정 대신에, 반대편의 시각, 즉 '남자와 소'라는 마초적 이미지를 생각하게 한다. '남자와 소' 이야기에는 노동, 근면, 삶, 우정과 같은 아름다운 언어들이 엮인다. 반면, '여자와 생명'에 관해 사실 이 영화는 거의 침묵에 가까운 태도를 보인다. 영화의 나레이션은 '여자의 목소리'지만, 여자는 해설자의 거리도, 관찰자의 거리도 아닌 애매한 거리에 놓여 있다. 일종의 '남자'를 보기 위한 관문으로 '여자의 목소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자의 말을 통해서 남자의 삶을 '듣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남자'는 이해받는다. 남자의 마초적인 태도, 남자의 피학적인 노동. (물론 이 노동이 인간의 운명과 굴레와 같은 것이라는 감독의 메시지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피학과 가학이 구별되지 않는 남자의 노동은 '우정'이라는 뚝배기 안에서 부드럽게 녹아있다. 이 영화의 감동은 '소의 죽음'에 있다. 영화의 카메라는 소가 죽을 때까지를 담는다. 목적도 '소의 죽음'이다. 마치 90년대 홍콩느와르의 영웅처럼 소는 느리게 죽어간다.
 이 영웅적인 죽음은 초반 장면에서 '남자'가 '소'를 위해 긴 계단을 올라가는 장면-마치 죽은 친구에 대한 비가(悲歌)처럼 보이는- 장면과 연결된다. '소'의 죽음은 소박하지만 웅장하다. '여자'는 그저 이 둘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홍콩느와르식 안티히어로인 셈이다. 이런 면에서 '여자'의 소외는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대한민국이 이 이야기에 환호한 것은 어쩌면 바로 그 구조에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영화의 흥행은 불길한 조짐일지 모른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한우 먹기를 거부할까? 소고기를 먹으면서, 죽어가던 소의 눈과 워낭소리를 떠올릴까? 그럴 필요도 없고,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흥미로웠던 장면, 소달구지 뒤로 FTA시위장면, 하지만 '남자'는 '무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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